공동체를 치유하는 십자가의 도 (고전1:18-25)
지난 시간 우리는 고린도 교회의 사분오열에 대해 안타까워하던 바울이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하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도’ 뿐임을 제안 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십자가의 도’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제시한 유일한 대책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모든 사람이 기쁘게 받아들였는가요? 아닙니다.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라 받아들이지 않고, 교양 있는 헬라인들에는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왜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분열의 해결책임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일까요?
고전1:22-23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바울은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갈구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한 이상의 표적이셨고 지혜이셨지만 그들은 주님을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고전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먼저 유대인들이 갈구한 표적은 영광 중에 오실 메시아였습니다. 그들이 표적을 구한 것은 모든 이방인들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영광 중에 회복시킬 그런 메시아였습니다. 하지만 경건한 유대인에게는 십자가에 달려 생을 마감한 예수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십자가의 달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구약에 ‘고난 받는 종(사53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그들에게 ‘고난 받는 종’이란 지금 자기들 자신이지 영광 중에 오실 메시야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당연하게 거리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정치적 승리의 메시아를 꿈꾸어 오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사역이 예루살렘의 회복이 실패된 채 끝나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의 하나님의 능력이 될 수 없었단 이야기가 됩니다.
이제 헬라인들을 이야기 해봅니다. 헬라인들은 십자가 달리신 예수님을 미련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미련하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이겠지요.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철학이라는 말이 지혜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보면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사람이 무슨 세상을 바꾸고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인생을 구원하겠는가라고 반문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헬라인들이 생각한 신은 인간 위에 군림하는 그런 존재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들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모순이었습니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지혜란 현실적 삶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지혜였기 때문에 십자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은 예수는 그들에게 있어 더 이상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더욱 깊을수록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바울의 영은 더욱 불타올랐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힘 있게 선포합니다.
바울이 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가요? 바울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얼마나 강력하고 지혜로운 분이신가 하는 것을 직접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러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그의 회심사건을 세 번이나 언급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통해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행전 21:3-4)
바울은 이스라엘이 아닌 길리기아(지금의 터키 중남부) 지역 다소에서 태어나 당시 최고의 지성이라 일컫던 가말리엘의 교육을 받은 해외 이민 2세대 또는 3세대로, 히브리어와 또 아람어까지 구사할 수 있었던 언어와 학식에 있어 아주 귀한 사람이었습니다.
위에서 증언한 대로 바울은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도 하고 결박하여 옥에 넘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스데반의 순교를 목도하는 증인이었습니다. 그것이 유대교를 잘 지키고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한 방식으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한 가지 의심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행 26:14)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만난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의 고민을 정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신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바울이 스데반의 순교 때 일어났던 사건으로 해석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이 충격을 받은 것은 죽음 앞에 두려움 없이 천사의 얼굴로 순교하던 스데반의 얼굴, 바로 그 스데반의 얼굴을 통해 죽음을 초월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자의 위대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기세등등하게 박해하던 자의 모습이 아니라 그의 얼굴을 생각할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가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나는 죽음 앞에서 과연 스데반의 얼굴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바울의 고민이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눈이 일시적으로 멀게 됩니다. 눈이 먼 바울의 모습은 더욱 초라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다른 사람에 의지하여 다메섹으로 가게 되었고 예수님 말씀대로 하나님의 사람 아나니아를 통해 눈을 뜨게 되고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부름을 받게 됩니다.
바울이 경험한 예수님은 한갓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실패한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셔서 기독교 신앙을 박해하려던 자신을, 가장 지혜롭다고 자청한 자신을 완전히 항복시키시고 새로운 존재로 만드신 가장 능력 있는 분이셨습니다. 거기에서 바울은 자신을 변화시키신 예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는 박해자에서 기쁨으로 박해받는 자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체득하게 된 것입니다. 박해를 받음으로 박해자를 부끄럽게 하고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승리가 있는 지혜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을 다음과 같이 힘 있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은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