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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엡3:1-13

오늘의 설교제목은 톨스토이의 잘 알려진 단편소설의 제목입니다. 하나님께 근신을 받고 있었던 한 천사는 세상에 가서 인간에 대한 세 가지 질문에 답을 찾아 올 것을 명령받습니다. 그 질문은 ‘인간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마지막 질문이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입니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지를 해명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질문에 대한 요즈음 사람들의 생각은 지난 몇 년 사이에 유명해진 ‘소확행’ ‘워라밸’이라고 하는 단어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소확행’이라는 말은 ‘소소하지만 확실히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들을 찾아 산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처음 쓴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등을 행복의 한 단면이라고 보았습니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은 말 그대로 ‘일하는 것과 나의 삶을 즐기는 것에 대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연봉이 적더라도 저녁 있는 삶, 개인의 행복을 중시하는 삶을 뜻합니다. 이러한 풍조는 2030세대에서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이민 가정에서도 이민 1세대와 2세대 사이에 차이 나는 갈등 가운데 하나도 이러한 삶에 대한 자세 때문에 생기기도 합니다. 1세대들은 많은 열정을 가지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일에 헌신하고 인내하는 삶을 살아온 반면, 2세대들의 삶의 자세는 그 보다는 훨씬 덜 하게 보이기 때문에 입장차이가 커지게 됩니다. 부모세대는 아이들이 인생을 대하는 자세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고, 자녀들은 부모들이 자신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 안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오늘 등장하는 인물 바울은 인생을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 중 한 명입니다. 그의 헌신으로 기독교 역사가 새로 쓰이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많은 사람들의 삶의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사명 받은 자’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이 사명은 ‘예수의 일’(엡 3:1)이라고 선언합니다. 바울은 이 일 때문에 옥에 억울하게 갇히게 되었지만 개의치 않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내게 과분히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엡 3: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이미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듯이 바울은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수많은 자연의 위협과 사람들의 위협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고후11:23-27)


고후 11:23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고후 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고후 11: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하지만 이런 고통도 그에게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과정이요, 오히려 오늘 본문 13절에도 말씀하듯이 영광된 고난이었습니다. 이 사명은 부족한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의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죽음을 불사하고라도 이루고 싶었던 사명은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비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바울은 계시로 받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비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엡3:3-4)


이 비밀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고(엡 3:6),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방인들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게 되었다.(엡 3:12)’는 것입니다.(이 복음은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개방성을 갖습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제약성을 동시에 지닙니다.)


사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조차도 고넬료 집안에 내리신 성령강림 사건 이전까지도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었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를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면 기독교는 아직도 유대교의 한 이단 종파로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이제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믿어,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후사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늘 멸시 하던 이방인들이,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 하던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되도록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를 포함한 모든 이방인들에게 들려져야할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사명은 아직 우리에게도 남아 있는 사명입니다. 은혜로 얻은 구원은 다른 이에게도 넘치는 강물처럼 흘러 넘쳐 알게 하여야 할 기쁨의 소식입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고 그리스도인들의 만남이나 전도는 더욱 힘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종말의 마지막을 알리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살았던 바울과 같이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크리스천다움’만이 인생을 가장 진지하게 대하는 자세임을 깨닫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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